조선시대 순교자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중 광주대교구 3위 순교자들 (조선시대 순교자)
  • 127. 유문보 바오로

  • 순교일: 1872.3.20 ~ 4.16
  • 순교형식: 옥사


자를 ‘윤보’(允甫)라 하고, 혹은 ‘작객’이라고도 불리던 유(柳)문보 바오로는 박해를 피해 전라도 영광과 충청도 남포 등으로 이주하였다가, 장성 삭별리에 정착하여 신앙 생활을 이어왔다. 그러던 중 1871년 11월(음력) 신미년의 박해 때 장성 삭별리에서 한 동료의 밀고로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된 유문보는 읍내 감옥에서 유치성 안드레아와 강영원 바오로, 그리고 다른 동료들을 만난다.

 

그곳에서 만난 유치성, 강영원과 함께 나주진영 영장에게 자주 불려가 신문을 받았는데,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교우들을 밀고하지도 않았고 ‘국법대로 사형을 내려주옵소서’라고만 대답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는 형벌로 인해 팔이 부러지기까지 하였다.

 

이후에도 다시 영장 앞으로 끌려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는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며 배교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발등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아 살이 타고 진물이 흐를 정도가 되었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옥에 갇혀 지내던 중, 유문보는 혹독한 고초로 인해 병이 들었고, 교우들이 그의 임종을 도와 권면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부르다가 옥에서 선종하였다. 이때가 1872년 3월 20일(음력 2월 12일)과 4월 16일(음력 3월 9일) 사이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였다.



  • 128. 유치성 안드레아

  • 순교일: 1872.4.16
  • 순교형식: 백지사

 

자를 '치경'이라고 하는 유(柳)치성 안드레아는 경상도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 겨우 두 살이 되었을 때, 경상도에서 일어난 1827년의 정해박해로 부모가 체포되어 충청도로 유배를 가게 되면서 충청도에서 성장한다. 후에 그곳을 떠나 전라도 무장의 암티점(현 전북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회장 소임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871년에 일어난 신미박해로 다음해 1월 2일(음력 1871년 11월 22일) 나주 포교에게 체포된다. 이때 포교가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라'고 하였으나, 그는 '절대로 배교할 수 없고, 교우들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나주로 끌려간 유치성은 그곳 진영의 옥에 갇혔고, 이곳에서 유문보 바오로와 강영원 바오로를 만난다. 이후 그들은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서로의 신앙을 북돋우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유치성과 두 동료들이 영장 앞으로 끌려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을 때 영장이 '너희들은 진실로 천주 신앙을 믿느냐?'고 묻자,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또 영장이 '이후에도 천주 신앙을 믿겠느냐?'고 묻자, 그들은 다시 '만 번 죽더라도 천주 신앙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영장은 너희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 하면서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고, 더욱이 그는 발등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아 살이 탈 정도가 되었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던 중 유문보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먼저 병으로 옥사하였고, 얼마 뒤 그는 강영원과 함께 나주의 군사 훈련장이요 형장이었던 무학당으로 끌려나갔다.


이곳에서 영장은 유치성과 강영원에게 마지막으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이에 이미 태장(笞杖) 30여 대를 맞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인 그들에게 영장은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내렸습니다. 이 형벌로 인해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72년 4월 16일(음력 3월 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 129. 강영원 바오로

  • 순교일: 1872.4.16
  • 순교형식: 백지사

 

자를 '영운'(永云)이라 하고, 혹은 '성운'이라고도 불리던 강영원(姜永源) 바오로는 본래 충청도 홍산 태생으로, 부모 때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하던 중 부모가 홍산에서 순교하였다. 이에

 

바오로는 집안에 있는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전라도 용담(현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후 다시 정읍 남면 이문동으로 이주하여 임군명 니콜라오의 집에서 품을 팔며 살았다.
강영원은 젊어서 상처하여 혼자가 되었으나, 20여 년이 되도록 재혼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천한 일을 즐겨하면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신자들과 함께 기도할 때면, 항상 겸손과 극기의 자세로 남보다 더 열심히 하였는데, 그는 교우들을 만나면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한다.

"나의 소망은, 박해를 당하게 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입니다. 지존하고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을 받으셨으니, 나같이 비천한 사람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신미박해가 한창이던 1872년 1월 3일(음력 1871년 11월 23일), 강영원은 여느 때와 같이 교우들과 함께 임군명의 집에 모여 기도를 하던 중 포교들이 몰려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성교예규와 다른 천주교 서적들을 챙겨 피신할 준비를 하다가 임군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본래 포교들은 임군명 체포하려고 왔으나, 강영원도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알고는 함께 체포하여 나주로 압송하였다.


그때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걸었던 그에게 한 아전이 버선을 벗어 주려고 하자, 한 포악한 포교가 버선을 칼로 찢으려 하다가 그의 발바닥을 베고 말았다. 나주까지 이송되어가는 동안 포교의 이러한 행패는 계속되었지만, 강영원은 이를 잘 참아냈다.


나주 진영에 도착하여 옥에 갇힌 강영원은 그곳에서 유치성 안드레아과 유문보 바오로. 그리고 다른 동료들을 만났고 이후 그들은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다른 교우들과는 달리 서로의 신앙을 북돋우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강영원은 영장에게 불려나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당하는데, 이때 영장이 '천주교를 가르쳐 준 사람은 누구이고, 책은 어디에서 났으며, 동료 교우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고 추궁하자, 그는 '천주교는 부모에게서 배웠는데 모두 체포되어 죽었으며, 책은 집안에서 내려오던 것이고, 가르친 사람이나 아는 동료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외우면서 "사람으로서 이러한 도리를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옷이 벗겨진 채로 앞뒤 가슴을 매로 맞는 등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소리 내어 외웠다.


옥에 갇혀 있을 때면, 그는 동료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를 바치곤 하였다. 그러다가 기한이 심하여 세상 복락을 생각하게 되자, 그들은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모두 유감을 입은 것이니 이 유감을 물리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자'고 서로를 권면하였다. 또 그는 포졸들이 음식을 끊어버린 후에는 다른 교우들의 밥을 조금씩 얻어먹으면서도 항상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그러던 중 동료 유문보가 형벌을 받고 병이 들어 위중하게 되자, 밤낮으로 그를 돌보아 임종을 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유치성과 함께 무학당으로 끌려나와, 마지막으로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신앙을 굳건히 지켰다. 그들은 영장의 지휘 아래 태장(笞杖) 30여 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가 1872년 4월 16일(음력 3월 9일)로,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5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