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보기

담화문

2023년 교구장 성탄 메세지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3-12-20
  • 조회수 :  154

2023년 교구장 성탄 메시지

 

2023년 교구장 성탄메시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오늘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열심히 준비하면서 기다려 왔던 성탄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신자 여러분의 모든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부유함도, 권력도, 명예도 없이 평범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지만 참된 행복을 선포하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실 구세주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십자가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도 쉽게 따라나서지 못하고 망설였지만, 자연의 섭리가 몸에 밴 가난한 어부들이 주님을 먼저 따라나섰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회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고 이천 년의 역사 안에서 굳건히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 바로 오늘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구유 안의 가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에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줄 따뜻한 방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님은 이 세상 삶의 첫 순간을 맞이하여야 했습니다. 오늘날 높이를 자랑하는 수많은 아파트와 그 안에 빈방들이 넘쳐나지만, 세상을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따뜻하게 맞아줄 방이 있을까요? 어쩌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은 서울의 고시촌에 몸을 누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주님을 알아보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릅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목동들은 구유 위에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왕좌에 앉아 권력을 행사하던 헤로데 왕은 하늘의 표징을 읽어내지 못하고 왕권 유지에 집착한 나머지 잔혹한 살인까지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왕의 후손으로서 세속적인 왕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게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다윗 왕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조국을 식민지에서 해방시키고,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을 것으로 희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국가의 통치와 같은 큰 문제부터 삶에서 부딪치는 구체적인 문제들까지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왕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적으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설교로써 사람들을 감동케 하는 힘을 보여주셨지만, 더 이상의 힘은 발휘하지 않으셨습니다. 실망한 제자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으며 참된 구세주가 아니라고 생각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에 보면 여기 있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는 누구일까요? 인생을 살다 보면 어느 누구라도 가장 작은 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죄를 짓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은, 고통이라는 감옥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혼자서 외롭게 나그네 살이를 하기도 합니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이 그와 같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의 포화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서 머물 곳과 먹을 것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이들입니다.

사실 명예나 부, 권력과는 상관없이 삶 속에서 심한 갈증을 느끼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라고 느껴지는 순간도 많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도 생깁니다. 그때 우리는 주변의 작은 이들의 힘겨운 상황에 귀 기울이고 고통에 공감할 뿐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기꺼이 손을 보태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의미는 서로 작은 이로서 서로를 사랑하고 어둠과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삶에서 생명의 삶으로 건너는 구원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찾아오실 수 있는, 작지만 넉넉한 장소로 만들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탄생의 장소로 마구간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작은 이웃들을 향해 열어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가장 작은 이웃들 환대하며 그들과 함께 성탄의 기쁨을 만끽하시길 빕니다.

 

 

20231225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옥현진 시몬 대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