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산정동성당






  • 소재지 : 전라남도 목포시 산정2동 74-78
  • 연락처 : 산정동 성당 (061) 274-1004 FAX (061) 276-4482

1. 6.25때 행방이 묘연한 세 성직자의 순교 기념비

산정동 성당은 광주 전남지역이 대목구로 승격(1957.1.21)되기 전까지는 주교좌 성당이기도 했던 전통있는 성당이다. 본당 앞에는 성모상이 세워져 있고, 6.25 전쟁 때 행방불명된 세분의 성직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비문이 성모상과 나란히 있다.

6.25 때도 박해시대 못지않게 180여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순교하고 또는 행방불명되었는데 그 가운데 광주교구장으로 있던 안 브렌난 몬시뇰과 산정동 본당 주임 신부였던 아일랜드인 고 도마 신부, 산정동 본당 보좌 신부였던 아일랜드인 오 요한 신부 등도 행방이 묘연하여 현재는 세 분의 순교 기념비만 세워져 있다.

당시 목포에서 인민군에게 잡혀 대전으로 이송되어 온 세 분 성직자는 대전시 목동 성 프란치스꼬 수도원 입구 좌편 마루방에 민주 진영 인사 및 신자 지도계급층 인사들과 함께 감금당하여 있었다. 이 사실은 당시 이들과 같은 방에 갇혀 있다가 해산일이 가까워 석방된 당시 충주 검찰청 오 검사 부인이 알려주어 알게 된 사실이다. 이후 9월 26일부터 28일 새벽까지 총성이 계속 들리더니 인민군들은 북으로 쫓겨 갔는데 세분 성직자가 있던 방에서는 인기척은 없고 다만 안 브렌난 몬시뇰의 여권과 명함, 성무일도가 발견되었다.

이 때 오기선 신부는 세 분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충남 사회과 도청 직원을 대동하고 성 프란치스꼬 수도원 뜰의 길이 10m, 높이 170cm의 구덩이를 파헤쳐 인민군들이 사살한 시체들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수도원 뒤뜰에 있는 37척 되는 우물 속과, 수도원 뒤 구덩이도 파보았으나 인민군들은 포로들을 전신에 콜타르를 칠하여 죽였고 사살된 지 오랜 시일이 지났기 때문에 시체가 부패되어 분간이 되지 않았다.

오 신부는 다시 대전 형무소도 가 보았으나, 1천 명씩 넣어 죽인 우물 8개 속에서도 성직자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도 9월 26일부터 28일 사이에 수도원 안에 감금되어 있던 인사들을 죽이는 총소리를 밤낮으로 들었다는 중언에 의해, 세 분 성직자는 인민군이 북으로 도망치며 포로들을 사살할 때 피살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이는 1981년 8월 13일 오기선 신부님이 고증한 사실이다.


■ 순교자

◆ 교구장 안 브렌난 몬시뇰 (Patrick Brennan) (1901-1950 추정)

미국 출생으로 1928년 사제품을 받고 오랫동안 중국에서 사목하다가 1949년 광주교구장으로 취임한 후 산정동 성당을 신자들의 요람지로 만들기 위해 전념하다기 6.25 때 인민군에게 잡혀 행방불명이 되었다.

◆ 고 도마 신부 (Thomas Cusack) (1910-1950 추정)

아일랜드 출생으로 1934년 사제품을 받고 광주교구에서 사목하다가 산정동 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는 동안 세계 제2차 대전, 8.15 해방을 맞았으며, 성인 신부로 추앙받을 만큼 선교사업에 정성을 다하다가 6.25 때 교구장 안 브렌난 몬시뇰과 보좌 신부 오 요한 신부와 함께 인민군에게 잡혀 행방불명이 되었다.

◆ 오 요한 신부 (John, O Brien) (1918-1950 추정)

아일랜드 출생으로 1942년 사제품을 받고 군종 신부로 사목하다가 한국에 와서 산정동 본당 보좌신부로 사목하는 동안 주로 젊은이들의 선교사업에 힘쓰던 중 6.25 때 교구장 안 브렌난 몬시뇰과 주임 신부 고 도마 신부와 함께 인민군에게 잡혀 행방불명이 되었다.


2. 전남 지역의 복음화와 산정동 성당

전라남도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온 다른 지역의 교우들이 노령산맥 줄기를 따라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면서부터였다. 이춘화(베드로),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바오로) 등이 박해를 받고 나주 무학당(武學堂)에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신앙공동체는 꾸준히 복음 전파에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새로 이주해 오는 신자들로 인해 전라남도 지역의 교우촌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82년 이후에는 리우빌(한국명 유달영) 신부에 의해 장성·순창·담양의 20여 개 교우촌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1896년까지도 전라도 지역은 전주 본당, 되재(升峙) 본당, 수류 본당 등 북부 지역에만 본당이 있었으며, 남부 지역의 공소들은 수류 본당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한국명 민덕효) 주교가 전라도 지역을 순방하면서 나바위(羅岩) 본당과 목포 본당의 신설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1897년 5월 8일 드예(한국명 조유도) 신부가 목포 본당 초대 주임으로, 베르모렐(한국명 장약슬) 신부는 나바위 본당 초대 주임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드예 신부는 아천리 공소에 임시로 거처하다가 현재의 산정동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1989년 7월 2일 목포로 거처를 옮겼으며, 1899년 초에 아담한 연와제 성당을 완공하였다.

3대 주임 샤르즈뵈프(한국명 송덕망) 신부는 1913년에 새 성당을 건립하였으며, 20대 주임 브라질 신부는 신축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1966년 5월 29일에 현재의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26대 주임 김성용(프란치스코) 신부는 1989년 11월 18일에 양로원을 개원하였다, 1988년 4월 5일에 레지오 마리애 한국 도입 기념비 축복식이 본당에서 거행되었으며, 1994년에는 산정동 본당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그 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 11월 15일에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기공식을 가졌으며, 1998년 5월 23일 축복식을 가졌다.



3. 레지오 마리애와 산정동 성당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는 50년 전에 광주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이었던 목포 산정동 성당에서 시작되었다. “성모님의 군대”라는 뜻을 지닌 레지오 마리애는 평신도 사도직 활동 단체로, 교회의 승인 하에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신 마리아(사령관)의 강력한 지휘 아래, 레지오(Legio, 군단)를 조직하여 세상 죄악의 권세에 대항하고 교회에 봉사하는 신심 단체이다.

처음 만들어 진 곳은 유명한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의 더블린시에 있는 프란시스 거리였으며 첫 단원들의 입단은 1921년 9월 7일 저녁 8시, 성모 성탄 축일 전야에 마이러 하우스에서 열렸다. 이 모체가 되는 지단의 이름이 "자비의 모후"였기 때문에 이 조직은 한동안 "자비의 모후회"로 알려졌다.

레지오의 목적은 단원의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데 있다. 그를 위한 방법으로는 레지오 교본에 명시된 규정에 따라, 사회적 봉사와 가톨릭 활동을 한다. 사회적 봉사 방법으로는 기도와 환자 방문, 사회 봉사기관 방문 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금전적인 면보다는 몸으로 하는 활동을 중요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