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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성모 신심[교회서적] 나주현상에대한 식별 / 황양주신부 2009년 석사학위논문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1-10-25
  • 조회수 :  1014



황양주신부 2009년 석사학위논문 " 나주 윤율리아와 연관된 일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식별" 내용중 일부 발췌


3. 나주현상의 문제점 


1) ‘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적현상들의 문제점


(1) 나주에서 일어난 이적현상의 진실성 문제


앞에서 개략적으로 소개한 나주현상들은 우리 눈에 놀랍게 보인다는 점에서 이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표징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무속에서도 환시나 환청, 불 위를 맨발로 걷는 것, 날카로운 칼날 위에 맨발로 서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할 수가 있다. 교회는 이것을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어떤 현상이 참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명백한 경우(예: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21,12))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식별을 통해서 판명해야 한다. 올바른 식별을 하기 위해서는 전통과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수행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나주현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주현상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 엄밀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나주현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이적이라고 주장하는 현상들이 사실은 그 진실성 여부가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선전하는데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이들이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현상의 결과물이지, 현상이나 과정 그 자체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적현상을 보았다는 것은 현상이 시작되는 순간부터가 아니라 현상이 나타난 다음이라는 사실이다. 사진사의 증언에 의하면, 눈물이나 피눈물, 향유 등이 흘러내렸으니 오라고 하여 가서 촬영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보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전체로 본 것은 아니다. 일단 사진사는 제3자로서 그의 증언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자신은 부탁받은 시점에 출현하여 부탁받은 대로 사진을 촬영하였을 뿐이지 그 현상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사진들을 찍었다는 사실과 그가 찍은 사진들은 그런 현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는지를 밝혀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둘째, 나주의 이적현상들이 발생한 시점이 대단히 인위적이어서 신빙성에 의문이 든다. 이적현상들은 주로 외국인 사제들이나 고위 성직자들이 방문할 때에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방문이 예상되는 날에 이적현상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들이 어김없이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기록하여 선전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지 않고서는 촬영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그들이 거주하는 성모경당에서는 미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주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드리곤 하였다. 주임신부는 보통 그들과 함께 미사를 공동 집전하는데, 주임신부와 공동 집전할 때에는 별 일이 없다가도 이상하게 주임신부가 없을 때에는 꼭 이적현상이 일어나곤 하였다. 이런 일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앞뒤의 사정을 감안해볼 때 우리는 그들이 사전에 기획 연출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연출이 아니라고 해도 자기암시에 의한 것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셋째, 많은 경우에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두고 그리스도교의 표징으로 해석하고 유통하는 것도 문제다. 예를 들면, 공중에서 하얀 물체가 떨어졌는데 그것을 가리키며 박연훈 루비노가 “오! 성체, 성체”라고 말했다. 머리 숙여 기도하던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서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보고 ‘성체’를 봤다고 한다. 루비노가 ‘하얀 물체’를 가리키며 ‘성체’라고 하니까 ‘성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율리아가 영한 성체가 입안에서 살과 피로 변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 성체가 살과 피로 변화되는 순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미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율리아가 그것을 성체가 ‘변한 것’이라고 하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인정해버리고, 그것을 보고서, 눈으로 보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또한 율리아 머리에서 나온 하얀 액체를 2,000년 전 성모께서 아기예수께 먹인 성모님의 젖이라고 했고, 유럽에서 온 어떤 사람이 1993년 7월 12일에 주고 간 나무 조각을 15년이 지난 2008년 7월 12일 성모께서 2,000년 전 예수님이 짊어지신 진본 십자가 조각이라고 했다면서 성광에 담아 경배하고 있다. 율리아가 ‘그것’이라고 선언하면 ‘그것’이 되고, ‘이것’이라고 하면 ‘이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넷째, 율리아는 수많은 치유 사례들이 있었다고 하면서 나주의 진실성을 주장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임파선 암으로 임종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 나주 성모님을 통해서 치유되었으며, 심장, 간, 고지혈증, 동맥경화, 신장 낭종, 신장결석, 십이지장궤양, 식도정맥류, 성기능 장애 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갖가지 병을 안고 살았던 사람이 성모동산의 기적수를 마시고 모든 병이 치유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치유기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치유의 경우에도 교회는 매우 신중하게 판단하는데, 조금이라도 의심이 남아 있고, 확실하지 않으면 기적이라고 선언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태도이다. 가톨릭의 기적 선언에 대해 개신교(루터교)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루르드와 파티마에서 일어난 치유에 대해 가톨릭이 아닌 의사들이 엄격하게 과학적인 조사를 하였는데... 루르드에서 일어난 치유 중 1,200건 이상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으나 가톨릭은 그 중 44건만을 기적으로 선언했다.” 이는 설령 의사나 과학자들이 기적이라고 판명했을지라도 가톨릭교회는 쉽게 기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리아와 그 주변인들이 이적현상에 집착하며 너무 쉽게 성모님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이다. 더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화상 입은 환자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소년이 나주 성모동산의 기적수로 나았다고 했으나, ‘PD수첩’의 취재진들이 확인한 결과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율리아가 치유 사례라고 주장하는 것들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위의 분석은 현상적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 자체가 거짓된 조작, 사술(詐術)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적현상의 주동자인 율리아가 일관되게 성실한 태도를 가져왔다면 모르지만 인품과 성실성, 진실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사실들이 있다면 당연히 현상들의 진실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MBC 'PD수첩' 취재진들의 노련함으로 일부 중요한 현상들이 거짓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면, 성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그 장면이 사실은 율리아가 호주머니에서 하얀 면병을 꺼내서 공중에 던진 것으로 밝혀졌다. 또 소위 ‘기적수’라는 것도 사실은 전기 자동 펌프로 퍼 올린 지하수이고, 장미향도 율리아가 몰래 넣고 다녔던 향수주머니 때문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렇게 영적 체험자의 신뢰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면 나머지 현상들에 대해서도 연출이나 조작이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의 진실성은 모두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나주현상의 영성적인 문제점


나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적현상들은 그 진위여부를 떠나 더욱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다양한 종류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적현상들이 왜 발생하는가?’ 다시 말해서 이적현상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첫째,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식별기준에 따르면, 이적현상은 예언이 참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징표라고 했다. 그렇다고 예언할 때마다 이적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나주 현상의 경우, 율리아는 기적이 주된 목적이 아니고 메시지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적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확인해야 할 것은 이적현상과 예언(메시지)이 나오는 순서이다. 참 예언의 경우라면 예언(메시지)이 먼저고 다음에 이적이 뒤따라오는 것이다. 그런데 나주 현상의 경우에는 대부분 이적이 먼저 발생하고 그 다음에 메시지가 나온다. 실제로 율리아는 이적이 일어날 때마다 성모님이나 예수님으로부터 어김없이 메시지를 받았다. 또한 그 메시지는 반드시 앞서 발생한 이적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니까 나주의 현상들은 이적이 메시지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가 이적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수단(이적)과 목적(메시지)이 전도된 것이다.


  둘째, 기적의 목적은 신기하고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애덕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이적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식별기준의 하나로 언급한 성령의 열매인 좋은 덕성들 특히 애덕이 나타나야 한다. 얼마나 신기한 현상인가, 얼마나 많은 수의 이적이 일어났는가 하는 이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덕행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인들 중에는 놀라운 신비체험을 하신 분들이 있지만, 신비체험 때문이 아니라, 덕행을 쌓았기에 성인이 되었다. 그런데 나주현상에는 이적현상이 있을 뿐 그 목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말해서 사람들은 이적현상을 보고 놀라고 신기해할 뿐 그것으로 끝이다. 나주현상은 애덕과 같은 향주덕을 추구하기보다는 이적현상 자체에 집착하고 있다. 그 결과 이적과잉현상을 보이고 이적현상의 강도가 점차 강해질 뿐만 아니라 대단히 자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적들은 그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영적 성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서 말한대로 어떤 현상은 상상이나 자기 암시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고, 또한 무속의 세계와 타종교에서도 관찰되기 때문에 모든 이적이 곧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기적이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셋째, 영적 성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적계시나 거짓 신비체험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공통 현상 중 하나가 자신들의 신심행위를 정당화시키기에 걸림돌이 되는 교도권적 가르침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사제들과 수도자들에 대하여 독설적인 공격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신비체험에 대한 예언자적 사명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이나 주장을 비호해줄 수 있는 교회의 핵심적(교도권의) 인물들(고위 성직자)에게 접근하려고 애쓴다. 이런 모습을 율리아에게서도 볼 수 있다. 율리아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한국인 성직자와 외국인 성직자 그리고 고위성직자들 앞에서만 기적을 보임으로써 그들을 통해 한국 교회로부터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동시에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한국인 성직자들은 오류에 빠져서 자신을 박해하는 불신자들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자들에게 사목 일선의 사제들을 불신하게 만들고, 사제와 신자들 사이뿐만 아니라 호의적인 사제들과 비판적인 사제들을 갈라놓는 등 한국 교회에 혼란과 분열을 일으키면서, 그 정당성을 위해 이적현상을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나주의 이적현상들은 인위적이며 목적지향성을 가지고 있어 그 진실성을 의심하게 한다. 나주의 이적현상들은 복음적 가치를 고양시키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공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현상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그저 호기심과 놀라움을 줄 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적현상을 통해 식별기준의 하나인 성령의 열매를 맺고 덕행을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안위와 위로에 치중할 뿐 교계제도와 교도권을 불신하며 한국 교회를 혼란케 하고 분열시키는 데에 이적현상을 사사로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그 진위여부를 떠나 교회적이지 않으며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할 근거가 없다’고 교도권은 선언한 것이다(참조; 제1차 공지문).


  2) ‘사적계시’라고 주장하는 ‘나주 메시지’의 문제점


  (1) 나주 메시지의 진실성


나주 메시지는 무엇보다 먼저 그 진실성이 의심된다. 그것은 메시지가 필요에 따라서 오락가락하고 그때마다 변경된다는 점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① 주문대로 제작하고 생산하는 메시지


나주 메시지는 책으로 발행할 때 필요에 따라 메시지의 내용을 빼버리거나 추가하거나 고치는 등 인위적이며 의도적인 경우가 많다. 주로 영적지도자에 의해서 주문되고 율리아가 제작하여 성모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산한다.


첫째, 파신부가 미용실을 그만두도록 종용하자 율리아가 성모님의 입을 빌어 메시지로 생산한 경우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 1986년 8월 7일 율리아는 장부와 상의하여 미용실을 처분했다고 했다. 그런데 파신부가 만든 [1992년 9월 23일, 나주 성모님과 비한국인 순례자들, 기름은? … 세번째이다.]라는 유인물 7페이지를 보면, “성모님께서 당신에게 미용실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하셨습니까?” 하고 묻자, “네, 성모님께서 이 일을 중지하라고 말씀하셔서 저는 순명하였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율리아는 이렇게 해서 미용실을 처분하였다.


둘째, 나주에서의 사건이 빨리 공인되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파신부가 주문한 메시지이다. 파신부가 만든 [한국 나주에서 눈물 흘리시는 성모상/ 보통 눈물, 피눈물, 전세계인을 위한 메시지/ 사건의 진상과 전개 과정]이란 유인물의 10페이지에 “우리는 언제나 한결같은 더 큰 사랑으로 울고 계시는 성모님과 함께 더욱 기도하여 그 사랑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인정되어 원하는 인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곳(나주)이 이 나라의 첫 번째 당신 성지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율리아는 ‘메시지가 널리 전파되기 위해서 주교에게 알리라’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87.4.21; 87.10.19).


셋째, 부산교구 박동준 신부가 1987년 4월 23일의 메시지 중 “환속한 사제들이 얼마나 착한지를” 이라는 문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파신부가 1988년 1월 23일 율리아에게 알려주었고, 이후 1988년 1월 25일 율리아는 “환속한 사제들이 원래는 착한 사제들이었는데”로 정정하여 파신부에게 알리고, 파신부는 이 정정 사실을 1988년 1월 28일 윤대주교에게 알려드렸다. 그런데 2006년에 출판한 ?나주 성모님 사랑의 메시지?에는 “환속한 사제들이 얼마나 착한지를” 이라고 나온다.


넷째, 파신부가 제작한 유인물 [성모님께서 선택한 율리아와 그 남편과 가족들에 대해서]의 8페이지에 “1989년 1월 28일 토요일 율리아와 남편 율리오는 여러 문제들을 의논하기 위해 안양에 있는 내게 왔다. 생각들이 오고 간 끝에 나는 율리아를 다른 가능할 수 있는 새로운 고통 형태를 준비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탄의 공격, 고문, 포악한 행위 등에 따른 고통들 말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율리아는 다음날 1989년 1월 29일 파신부와 함께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원에 갔는데, 그곳에서 황데레사와 함께 두 번째 연결고통을 받은 현상과 메시지가 나온다.


  ② 의도적이고 인위적으로 메시지를 넣거나 빼고 수정함


나주 메시지는 초기에는 유인물 형식으로 제작하다가 1989년에 처음으로 1985년 6월 30일부터 1989년 2월 23일까지의 내용을 ?나주의 성모님 메시지?라는 책으로 발행했다. 이후 계속된 메시지를 덧붙여 93년과 94년 그리고 95년 등 해마다 책을 발행했는데, 가장 최근에는 1985년 7월 18일부터 2006년 6월 3일까지의 내용을 ?나주 성모님 사랑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발행했다.


그런데 ‘내용 자체가 바뀌는 경우’와 ‘자필 일기에 있는 내용들이 인쇄된 책에서는 빠진 것들’이 있고, 앞의 책에 있던 내용이 뒤에 출판된 책에서 빼거나 고치고, 앞의 책에는 없던 내용이 뒤의 책에 나타난 것들이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88년 1월 29일 황데레사가 율리아에게 그의 소명을 전수하는 첫 번째 연결고통을 받은 날의 현상과 말씀을 처음부터 통째로 빼버렸다.


둘째, 1988년 1월 30일의 현상과 말씀 중에 앞의 책에서 “데레사는 걱정하지 말아라.”가 뒤의 책에서는 “딸아 걱정하지 말아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발행한 책에는 ‘딸’이라는 단어는 나오지만, 이 문장 자체가 없다.


셋째, 1991년 5월 23일 장신부가 최 베드로의 권유로 맨 처음 성모경당에 갔던 날로서, 이날 성모님의 말씀 중 “내가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과 “성모님은 두 사람을 꼬옥 껴안아 주셨다”는 현상에 대한 자필일기의 내용이 ?나주 성모님 사랑의 메시지?에는 빠졌다.


넷째, ‘성모동산’에 대한 메시지를 전부 빼버렸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광리’에 있는 ‘성모동산’과 ‘기적수’가 나오는 ‘샘터’ 그리고 ‘마리아의 구원방주 대성전터’는 모두 1992년 8월 27일 성모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주 성모님 사랑의 메시지?에는 이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장홍빈 신부의 1992년 7월 27일자 일기를 보면 알게 된다.


장신부의 일기에 따르면, 성모님께서 직접 발현하시어 샘터와 대성전터 그리고 ‘마리아의 구원방주’와 깃발 모습까지 보여주셨다고 하는 곳은 ‘나주 신광리’가 아니라 ‘전남 화순’이다. 성모께서 나주가 아닌 화순에 발현하신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율리아의 후원자인 최 베드로가 화순에 있는 자신의 땅 일부를 율리아에게 기증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리아와 장신부 그리고 베드로와 몇몇 협력자들은 1991년 11월 25일, 26일, 28일 베드로가 기증하기로 한 화순에 있는 산에서 미사를 드렸고, 그때마다 성모께서 발현하시고 직접 샘터와 대성전터에 대한 메시지를 주셨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28일에 성모께서 알려주신 구원방주 샘터에서 성경을 펴니 요한복음 7장 38절이 나왔다고 한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섭리해 주신 말씀이라며 거기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감격의 눈물까지 흘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12월 5일에 율리아가 직접 손으로 샘터 땅을 팠는데 물이 나왔다. 그러니 화순 땅은 확실히 주님께서 섭리해주신 곳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성모동산은 화순이 아니라 나주 신광리에 있다. 성모께서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그것도 직접 그 자리에 발현하시어 구체적으로 자리까지 지정해주시고, 성경말씀까지 들려주시며 주님께서 섭리해주신 자리인데 왜 그 섭리의 땅 화순을 마다하고 나주로 옮겨야 했는가? 그것은 기증하기로 했던 사람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섭리가 잘못되었거나 성모께서 변덕을 부리신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없는 주님의 섭리가 사람의 필요에 따라 성경구절까지 들먹이며 나타나고, 사람의 변덕에 따라 성모께서 춤을 추신 셈이다. 적어도 성모성지인 성모동산과 샘터에 대한 환시와 메시지는 다른 이적현상들 못지않게 중요할 텐데, 화순에 대한 메시지는 물론 나주 신광리에 대한 메시지도 책에서 완전히 빼버린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주 메시지는 그 진실성에 대단히 심각한 결함이 있다.


  (2) 나주 메시지의 신학적 문제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나주 메시지는 그 진실성 자체가 의문시되며 그 내용도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① 마리아론의 문제점 ② 부정적 세계관의 문제 ③ 종말론과 구원론상의 문제점 ④ 성령강림의 국지(局地)화 주장 ⑤ 성체성사의 희화(戱畵)화 등이다.


  ① 마리아론의 문제점


율리아를 통해서 성모님께서 말씀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나주 메시지에는 마리아론적인 관점에서 문제가 많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알고 있는 마리아와는 너무도 다른 마리아이기 때문이다.


  첫째, 마리아 중심인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


나주 메시지에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다. 이는 성경과 교리에서 가르치는 바와 상충된다. 예수님은 메시지를 주실 때마다 항상 어머니를 언급하고 있다. 어머니를 언급하지 않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거의 없다. 문제는 언제나 마리아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마리아의 대변인, 보조자, 마리아의 말과 행위를 미리 알려주거나 나중에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멀지 않아 내가 내 어머니와 함께 너희 각 사람에게 갈 것이다... 그러니 어서 잠에서 깨어나 내 어머니를 통하여 나에게로 오너라.”(94.4.3) “한국의 남북 정상회담을 누가 주선했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바로 내 어머니 마리아다.”(2000.6.13) “아! 외롭고 슬프구나. 감실을 마련해달라고 내 어머니께서 그렇게도 간곡히 부탁을 하셨건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기에 대천사 미카엘을 시킨 내 어머니의 뜻에 따라 위격적이고 신격적인 나의 현존 그 자체인 성체를 통하여 내가 한국 나주에 온 것이다.”(2000.11.2)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속의 마리아는 철저하게 ‘제자됨’을 보여주셨다. 마리아는 성전에서 잃었던 어린 아들을 찾았을 때,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몰랐느냐’는 아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41-52 참조). 또한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라고 하셨다. 마리아는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였다. 마리아는 듣고 간직하는 사람이었지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런데 나주 율리아의 메시지에서는 예수님이 성모 마리아를 두둔하는 변호인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객이 전도되는 이런 모습은 신앙의 희화화에 지나지 않아 메시지의 상당 부분이 율리아의 상상력의 소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둘째, 존경받지 못해서 불평하시는 마리아


성경 속의 마리아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시고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런데 나주 율리아가 전하는 성모님은 스스로 존경받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시고 불평하신다. 이 부분도 율리아의 심리적 투사와 객관적인 메시지를 혼동케 하는 요소가 된다. “모든 이로부터 존경을 받아야할 내가 천대받고 버림받고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제 멋대로 함부로 들었다 놓았다 하며 나를 외면해 버리고 있으니 내 마음이 몹시 슬프다. 어서 나를 도와다오.”(1988.2.4.) “하늘의 여왕으로서 존경받아야 될 내가 지금 지상 자녀들의 분열과 혼란 때문에 많은 희생과 고통과 눈물로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도와다오.”(1990.10.4.) “내가 언제까지 이리저리로 옮겨 다녀야 된단 말이냐. 어서 서둘러 내 아들 예수의 대리자인 사제들과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내 집을 마련해다오.”(1997.8.15.)


  셋째, 나주 율리아의 성모님은 성경말씀이나 교회의 가르침보다도 나주 메시지를 인정받아 전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계시하시는 듯 하다. 성모께서 곳곳에서 눈물과 피눈물로 호소하는 것은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나주 메시지가 인정받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성모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나주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아무리 좋은 글도 알리지 않고 가만히 놔두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어서 퍼뜨려라.”(1995.6.19) 심지어는 메시지 인준과 성모경당에 감실을 설치하고 미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주교와 타협하라.’(1989.2.23)는 메시지까지 주셨다. 교황청에서 교황비서가 찾아왔을 때는 인준을 호소하면서도, “나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주님께서도 어쩔 수 없으신데 낸들 어쩌겠느냐? 사울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너희는 알지?” 라고 하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은근히 협박까지 하셨다(1997.7.13). 이것이 과연 성모님의 메시지인가?


  이천여 년의 가톨릭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는 다섯 가지다. 하나,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시다. 둘, 마리아는 평생 동정이시다. 셋, 마리아는 원죄없이 잉태되셨다. 넷, 마리아는 승천하셨다. 다섯, 마리아는 구원의 중개자이시다. 교회가 이런 가르침을 통해 마리아를 공경하는 최종 목적은 구세주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원죄없이 태어나고, 평생 동정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한 깨끗한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이다. 즉 예수님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다. 마리아가 구원의 중개자라는 선언은 마리아가 직접 구원을 중개한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에 마리아가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마리아에 대한 교리는 모두 마리아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며, 또한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그런 교리가 선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주 메시지 속의 마리아는 여신(女神)의 위치에까지 올라가 있다. 이는 잘못된 성모신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② 부정적 세계관의 문제


나주 메시지는 죄악과 대 타락의 시대를 강조하고 있으며 매우 부정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비록 세상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개선을 위한 희망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이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그런데 율리아에게 세상은 의미가 없고 온갖 죄악으로 위협받고 있다. 이 세상은 얼른 떠나야 할 죄와 타락의 땅일 뿐이다. “이 세상의 많은 자녀들이 지금만큼 회개에서 멀리 떨어져 마귀의 조종을 받으며 파탄을 초래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1990.8.15) “지금 이 시대는 노아의 홍수뿐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보다도 더 많이 부패한 대 타락의 시대가 되어버렸다.”(1996.6.27) “세상은 지금 죄악이 포화상태가 되어 대 타락에 이르러 하느님의 진노의 잔이 넘치고 있단다.”(1997.6.12) 이렇게 율리아의 메시지는 기쁨보다는 공포를, 희망보다는 혼란을, 사랑보다는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대로, 물질적 가난과 온갖 질병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심리적 상처로 점철된 율리아의 인생 역정과 무관하지 않다. 즉 쓰라린 인생 역정을 거치면서 세상이 무섭다고 했던 율리아의 인생관과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부정적 세계관이 그리스도교적 외피를 입고 확산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선하며(창세 1,31 참조), 인간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죄에로 기울어져서 타락하였지만, 구세주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에 힘입어 결정적으로 구원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선언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이 승리에 힘입어 궁극적인 승리에 이를 것임을 믿는 낙관주의자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명히 수많은 환난 가운데 악을 거슬러 싸우고 죽음까지도 겪어야 할 필요와 의무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파스카의 신비에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화되어 부활을 향한 희망으로 힘차게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사목헌장? 22항). 따라서 나주 메시지 속에 담겨 있는 부정적인 세계관은 교회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죄의식과 불안을 조장할 뿐이다.


  ③ 종말론과 구원론상의 문제점


종말론과 구원론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나주 메시지에서는 ‘이 시대의 메시아’인 율리아가 하느님의 징벌을 연기시켰다고 한다. 이는 신관과 종말론 그리고 구원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


예수님과 성모께서는 불쌍한 죄인들을 회개시켜 구원하시려고 율리아를 어린 시절부터 미리 준비시켰다고 한다(1987.3.13). 그래서 율리아는 성모님과 예수님의 명을 받들어 세상 온갖 죄인들,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속고통을 받고 있으며, 나아가 인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 성모님의 고통까지도 대신하여 받고 있다고 한다. 율리아가 이 시대 우리의 구원을 책임진 메시아인 것이다. “네가 전하는 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영혼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너를 배척한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배척하는 것이다.”(1995.6.18)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징벌에 대해 미리 율리아와 상의하시고, 율리아 때문에 연기하셨다(1995.6.16)고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인간들의 회개와 사랑의 실천 그리고 율리아의 기도와 대속 고통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지금 징벌을 내려도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율리아가 “예” 라고 대답했다면, 하느님께서 세상을 멸망시켰을까? 이 메시지의 함의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멸망시키시기 전에 그 의도를 밝히고 인류를 대신하여 간청하는 간구를 들어주시어 그 계획을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일은 구약성경의 아브라함이나(창세 18,16-32) 모세(탈출 32,7-14.30-35) 말고는 없었다. 따라서 율리아가 이들의 반열에 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대단한 교만이나 무지의 소치라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구세주가 아니었으며 그의 삶과 언행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리키셨다. 성모님의 역사상 발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성모님은 결코 중심에 서고자 하신 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율리아는 스스로 구세주의 자리를 취하는 결정적인 우를 범하고 말았다.


또한 ‘그 날과 그 시간은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이 아신다.’(마태 24,36)고 했다. 아버지만이 아신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인간의 타락 때문에 세상의 멸망을 앞당긴다는 말도 아니고, 또 의인들 때문에 연기한다는 말도 아니다. 그와 관계없이 하느님께서 때가 되면 하실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뜻에 따라 세상을 벌하시는 것이 아니다. 창조와 종말은 하느님의 일이다. 더군다나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의하면 종말은 징벌이 아니라 세상의 완성으로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이며, ... 그 시간은 하느님만이 알 수 있다.” 그런데 나주 메시지의 구원론과 종말론은 율리아 때문에 징벌을 연기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종말을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완성이 아니라, 인류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④ 성령강림의 국지(局地)화 주장


나주 메시지 중에는 ‘제2의 성령강림’에 대한 메시지가 여러 차례 나온다. “새로운 성령강림이 이루어질 것이다.”(1993.5.27; 1994.9.24) “제2의 성령강림으로 새로워질 것이다.”(1993.6.27) “성령강림의 때를 단축시켜 맞이해야 한다.”(1994.11.24) “이 세상은 부활과 새로운 성령강림이 있을 것이다.”(1995.11.21)


가톨릭교회에서 제2의 성령강림은 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의미하였다. 그 외에도 성령강림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지금 여기에서 작용한다는 믿음의 맥락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성령이 없이는 교회가 뼈만 남은 조직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피가 통하고 살이 붙은 살아있는 교회가 된다. 성령은 교회가 교회답게 살아가게 해주는 교회의 생명이다. 다시 말해서 제2의 성령강림은 특정지역이나 특정단체, 기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디가 되었든지 간에 하느님의 살아있는 지체가 되게 하는 보편적 은총이다.


그런데 율리아의 메시지에서 말하는 ‘제2의 성령강림’은 결국에는 나주 메시지의 인정과 전파 그리고 ‘마리아의 구원방주회’ 설립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93년 5월 27일은 성모성지에 대한 언급과 함께 이 말이 나왔다. 1994년 9월 27일에는 마리아를 인정하지 않는 루터 교회가 앞으로 교회의 어머니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과 예루살렘 다락방을 언급하면서 이 말이 나왔다. 그리고 교황대사가 찾아온 1994년 11월 24일에는 교황을 통해 나주 메시지를 인정받고자 하니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 교황대사가 왔으니 곧 될 것 같은 마음에 ‘성령강림의 때’를 단축시켜 맞이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1995년 11월 21일은 ‘나주조사위원회’가 참고인들을 면담하는 등 활발히 조사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한 달 전에 교황청 미사에서 교황에게까지 기적을 보여주었는데도 나주 메시지 인준에 대해 아무런 언질이 없으므로 더욱 조급해진 마음에,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준비하였듯이 나주 메시지가 인정받고 널리 전파되도록 이 마지막 시대의 사도들이 되어 함께 기도하자고 한다. 따라서 ‘제2의 성령강림’은 나주 메시지를 인정받고 ‘마리아의 구원방주회’를 설립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때를 빨리 단축시키자는 말 속에 그 조급함이 엿보인다. 이는 공적인 사건인 성령강림을 사사화(私事化)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율리아의 청원을 성모님의 메시지로 둔갑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한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나주 메시지에는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그 순수성과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고, 내용은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부분들이 있어서 사적계시라고 믿을만한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고 교도권은 선언한 것이다(참조; 1차 공지문).


  ⑤ 성체성사 교리에 대한 혼란


성체기적에 대한 현상과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성체가 위에서 내려왔다는 것, 둘째, 미카엘 천사가 어느 감실에서 그리고 죄 중의 사제에게서 성체를 빼앗아 왔다는 것, 그리고 셋째, 율리아가 영한 성체가 입안에서 살과 피로 변했다는 것이다.


첫째, 교회는 미사 중 사제의 축성을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실체변화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이 경우는 미사 밖에서 이루어진 일이니 ‘성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를 ‘성체’라고 공경하는 것은 오히려 ‘성체’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성모께서 미카엘 천사를 시켜 죄 중의 사제에게서 성체를 빼앗아 왔다는 주장은 교리상의 문제가 있다. 죄 중에 있는 사제가 집전하는 성사가 유효한가의 문제인데, 일반 교우들의 심정에서는 유효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런 메시지가 주장되고 유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교회는 오랜 고뇌 끝에 성사의 사효성(事效性: ex opere operato)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사는 그것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의로움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가톨릭 교리서?, 1128항) 이 교리는 7성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제정하셨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예수님의 도구이며, 진정한 제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사성제가 유효한 것은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흠이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미사성제의 진정한 제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그러하다. 만일 성사의 사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매번 성사에 참여할 때마다 교우들은 그 성사의 유효성 때문에 번민하게 될 것이다. 결국 교회는 교우들의 영적 선익을 위하여 근본적인 차원에서 성사의 유효성의 근거를 인간에게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교리를 확인하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율리아는 ‘죄 많은 사제에게서 빼앗아 온 성체를’ 죄 없는 사제에게 넘겼다고 주장하였다. 율리아에게서 성체를 받은 그 사제가 죄가 없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결국 이런 주장은 사제단을 분열시키고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적, 윤리적인 완벽함 위에 세우는 우를 범하게 할 뿐이다. 사도 바오로의 주장대로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행실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물론 ‘죄 많은 사제’에게서 성체를 빼앗았다는 주장은, 성체성사의 지고함을 상기시키며,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마땅히 죄에서 정화되어야 한다는 엄중한 꾸짖음으로 여겨져서, 충분히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그러나 이런 직설적인 꾸짖음은 대단히 인간적인 표현이며 성경의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죄 많은 사제’가 무심하게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또 얼마나 ‘죄 많은’ 교우들이 무심하게 성체를 받아 모시는가! 그래도 자비하신 하느님은 지금껏 죄 중에 성체를 영하는 교우에게서 성체를 빼앗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마태 26,28)를 성찬례에서 주신다. 하느님의 교육 방식은 인간의 방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은 죄인이라 하여 그의 권리를 박탈하는 무자비한 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죄많은 여인(루카 7,37-50),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요한 8,3-11), 가출했다가 돌아온 아들(루카 15,20-21), 그리고 세리 자캐오(루카 19,1-10)에게 결코 죄를 묻지 않았고 오히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라고 선언해주신 분이시다.


또한 율리아가 주장하는 대로 성모께서 미카엘 천사를 시켜 죄 중의 사제에게서 성체를 빼앗아 율리아에게 주고, 이를 다시 교황대사에게 주어 분배하도록 하셨다는 것은 율리아가 직무사제의 기능을 대신할 뿐 아니라, 교황대사보다 더한 위치에 서 있음을 주장하는 말로서 교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인간적으로는 가상한 생각이지만 사랑이신 주님의 가르침과는 어울리지 않으며 오히려 회개로 이끄는 긍정적인 죄의식이 아니라 절망으로 인도하는 부정적인 죄의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즉 스승을 배반한 유다가 부정적인 죄의식으로 인해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생각하고 나 같은 죄인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며 절망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처럼, 조그마한 죄에도 크게 상심하고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생각하여 하느님을 멀리하게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율리아가 모신 성체가 입 안에서 살과 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도 앞 선 사례들처럼 의심의 여지가 있다. 같은 하나의 미사에서 여러 사람이 성체를 받아 모셨는데 유독 율리아가 모신 성체만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특정한 변화사건을 통해서 뭔가를 제시하려고 했다면 변화된 그 ‘살’을 보존하여 증거로 삼아야지 왜 먹어버렸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이는 하나의 사술(詐術)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한다.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진위여부를 떠나 신자들에게 성체성사 교리에 대해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준다는 것이다. ‘사제가 미사 중에 빵과 포도주를 축성함으로써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로 실체변화 하지만 여전히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성체성사 교리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76항. 1412항. 1413항.).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 살과 피를 직접 떼어서 주신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사라지고 그 외형이 다른 실체(살과 피)로 변한다면 그것을 성체라고 할 수 없다. 예수께서 그렇게 직접 살과 피로 주신다면 굳이 성체성사가 왜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이는 과거 교회역사에 있었다는 성체기적(예, 8세기 란치아노 성당의 성체기적)과 관계없이 성체성사 교리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가져온다는 것이 교도권의 선언이다(참조; 제1차 공지문).


  3) 나주현상의 중심인물인 율리아의 문제점


  (1) 율리아의 인간적인 성향(기질)


율리아는 어린시절부터 물질적 가난으로 인한 고통, 잦은 병치레와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받은 무시와 배신 등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 등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점에서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위로와 격려 그리고 사랑과 존중이 필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기구한 인생 여정은 인정욕구, 사랑받고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 등의 보상심리가 무의식 속에서 그녀의 기질을 형성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율리아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소질과 능력이 있었다고 본다. 첫째, 10살 무렵인 초등학교 3학년 때 즉석에서 노래(곡과 가사)를 만들어서 불렀고, 처녀시절에 갑작스레 참여한 백일장에서 중학생 때 썼던 시를 기억해내고는 그대로 써서 일등을 했다. 그리고 주로 여성을 상대로 대화를 많이 하는 미용사였다는 점과 주변사람들에게 인생 상담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아 남다른 기억력과 문학적인 소질 그리고 언변에 뛰어난 재주가 있다고 본다. 둘째, 초등학생 때 그네를 타다 떨어져 실신하고 3일 동안 혼수상태였다가도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일어났다는 것, 중학생 때 자신도 모르는 답변을 하여 선생님을 놀라게 했고 그런 일들이 자주 있었다는 점, 예비신자 때부터 이상한 현상을 보고 들었으며 신앙상담과 안수기도로 치유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율리아는 남다른 특별한 능력(초능력, 염력, 무속인의 기질, 신기(神氣))을 소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율리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부 현상들은 율리아의 남다른 기질이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다.


  (2) 율리아의 진실성 문제


율리아는 1980년에 처음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1973년에 누구의 권유도 없이 율리아 부부가 스스로 성당에 나갔다고 한다. 또한 예비신자 교리는 물론 평일미사까지 빠짐없이 참석했다고 하는 1973년의 예비신자 때의 내용이 1980년 예비신자 때의 내용과 똑 같다. 성모동산 조성에 대해서도 장홍빈 신부의 일기에 의하면, 1992년 8월 27일 신광리 땅 7,000평을 6,500만원에 계약했고,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현금과 얼마간의 부동산을 담보로 하여 구입한다고 했다. 그런데 2003년 율리아 부부는 교구장과의 면담에서 성모동산을 조성한 일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며 파신부의 계획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고, 성직자 명의로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율리오의 명의로 구입했다고 했다. 또한 교구장이 율리아에게 ?갈멜의 산길?을 읽으라고 했을 때 글자를 모른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다른 책은 안 읽고 성경만 읽는다고 변명했다. 조사위원들과의 면담에서도 성경만 읽는다고 했으나, 오기선 신부와 파신부가 읽으라고 줬던 책의 내용들이 ‘나주 메시지’ 속에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성경 외에도 다른 책들을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PD수첩’ 제작진이 ‘성혈’의 유전자 검사를 제의하자 “주님의 살아계신 살과 피를 함부로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나주성모동산 내의 기념품 판매점에서 성혈이 담겨있는 묵주를 5만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그 외 ‘PD수첩’의 방영으로 일부 현상들이 거짓으로 드러난 점으로 보아 율리아의 증언과 행동에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율리아의 겸손과 순명의 문제


율리아는 물질적 가난과 육체적 질병 그리고 심리적 상처로 잠재된 보상 심리 등으로 인해 신자가 된 다음 통상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기이한 현상 등을 통하여 주목받는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체험을 겸손하게 처리하거나 숨기지 않고 즐기는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설령 하느님의 영이 율리아에게 작용했다 하더라도, 교회의 판단이 내리기 전까지는 조용하게 기다리며 정상적인 생활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율리아는 교회의 판단도 없이 자신의 체험을 스스로 기적이요 사적 계시라고 단언하며 주장했다. 그리고 교구장의 인준을 받으려고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 접촉하는 등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또한 자신을 인정하는 사제들만 사제로 인정하고 비판적인 성직자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불의한 자들로 여겼다. 그래서 신비체험을 통해 더욱 하느님을 찬미하고 애덕을 실천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며 교회 안팎으로 혼란과 분열을 일으켰다. 또한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은 물론 교도권의 선언이 발표된 뒤에도 교회의 정당한 권위에 겸손하게 순명하지 않고 거부하고 반발하였다. 이는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비체험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4) 율리아와 재산문제


율리아가 교회의 정당한 권위에 불순명하는 배후에는 돈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PD수첩’을 통해 율리아 부부 소유의 땅이 나주현상이 시작된 1985년을 기점으로 20배 이상 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율리아는 마치 아무런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교회가 하루빨리 나주현상을 인정한다면 모든 것을 교회에 다 내어드리고 조용하게 살겠다고 한다. 이는 교회의 구조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성금은 교회의 이름으로 봉헌된 것들로서 결코 율리아 부부의 소유가 될 수 없다. 또한 해당 교구장은 당연히 재정에 대한 감사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율리아는 교회의 이름으로 성전 건축을 예고하고 모금하고 있는데, 만일 그 모금과 금품수수가 미사예물과 헌금의 형태라면 더더욱 직권자인 교구장의 감사가 절대적이다. 그런데 율리아는 교구장이 명한 회계감사 지시에 순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율리아는 교구장이 나주현상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재산을 헌납하라고 한다고 왜곡하고 있다. 이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식별기준으로 볼 때 체험자가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4) 영적 지도자와 추종자들의 문제점


  나주 현상이 자동처벌 파문제재까지 받게 된 것은 영적지도자의 성급함과 미숙함 그리고 잘못된 교회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파신부는 타교구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해당 교구장의 허락도 없이 사적계시 문제에 관여하고 지도신부 역할을 했다. 이는 성직자로서 기본적인 자세를 벗어나 교회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파신부는 나주현상에 대한 식별과 판단을 묻는 ‘(약칭)나주 조사위원회’의 질문에 대해, 교황청의 ‘신앙교리성’이 판단할 일이라며 답변을 회피하였다. 이는 지도자로서 체험자에 대한 자신의 식별기준과 판단을 답하지 않은 것도 문제이지만, 그런 판단은 신앙교리성이 할 일이라고 하면서도 신앙교리성의 판단도 없이 스스로 사적계시요 성모님 메시지라고 단정하고 선전한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사실관계와도 맞지 않다. 즉 사적계시나 신비현상에 대한 일차적 판단은 신앙교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할 교구장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파신부는 근본적으로 높은 권위(교황청)에 의지하여 정당한 권위(교구장)를 무시함으로써 교회질서를 어지럽게 하였다. 이는 곧바로 율리아와 추종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검증도 없이 율리아가 주장하는 것들을 그대로 ‘성모님의 메시지’라고 단정하고 전파한 것이다.


둘째, 장신부는 감성적으로 율리아의 체험과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버림으로써 영적지도자라기보다는 추종자에 더 가깝다. 그는 외적으로 드러난 표징과 자신의 체험을 중시하여 교구장의 권고를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당 교구의 사제라는 점에서 율리아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선전용으로 활용되었고, 이는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는 역할을 했다.


셋째, 율리아 추종자들은 독자적으로 각 교구별, 지역별 책임자를 정하고 자체적으로 기념일까지 정하여 정기적으로 기념일에 성시간과 기도회 등을 하고 있다. 심지어는 기존의 수도회를 탈퇴하여 별도로 ‘마리아의 구원방주 수도회’를 설립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참으로 나주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각자의 가정과 본당으로 돌아가 각자의 자리에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리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주의 경우에는 율리아와 성모동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파당을 형성하고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다. 개인적인 신념과 자기 확신을 존중해야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에서 한 순간 일탈한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지속적이라는 점에서 이교(異敎)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4. 문제 해결을 위한 제언과 나주 현상의 교훈


  1) 영적체험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겸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교회의 공인을 받은 발현 체험자들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선물처럼 주어지고 발생하는’ 체험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교회에 알리고 그에 대한 판정을 기다렸다. 파티마와 루르드 성모님 발현지의 체험자는 어린이들이었다. 그리고 과달루페 발현을 목격한 사람은 순박한 농부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생각을 보태거나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교회에 전달했을 뿐이다. 그 사건을 체험자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관계되는 사람에게 전달하면 체험자의 일은 완수되는 것이다. 성령의 활동은 공동선을 위해 주어지는 선물이다. 따라서 체험자는 이적현상이나 메시지의 소유자가 아니다. 요즘말로 해서 발현 목격 체험을 ‘재산권’이라고 한다면, 그 소유권은 체험자가 아니라 교회에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꼭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준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체험자의 책임도 아니고 체험자가 애를 쓸 일도 아니다. 그저 책임자인 교회에 알리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체험자(증거자)로서의 바람직한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체험자의 겸손과 교도권에 대한 순종을 가장 중요한 식별 기준의 하나라고 한 것이다.


율리아에게 애초에 어떤 기이한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을지 모른다. 그때 율리아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는 성모님의 모범을 따랐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나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강조했듯이 외적 표징에 너무 쉽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성령으로부터 오는 내적 표지와 삶의 열매(사랑)를 더 중요시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겸손하게 알아듣고자 노력하며, 바깥에 알리기보다 먼저 그 정신을 살고자 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율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율리아는 자신의 체험과 주장을 인정받는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이미 내려진 교도권의 판단을 사심없이 받아들이고 순명해야 한다. 예수께서도 “형제가 잘못하거든... 교회에 알리라.”(마태 18,15-17)고 하여 공동선을 위한 판정권이 교회(교도권)에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자신의 옮음을 주장하며 스스로 세력을 형성하고 교회에 저항하면서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지 말고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도권에 따라야 한다.


  2) 영적 지도자에게는 특별히 신중함과 성숙한 교회정신이 필요하다.


  영적지도자가 초기에 잘 대응하였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되지 않고 미담으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본당 신부가 3개월간 그 성모상을 사제관에 모시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돌려주었는데, 그때 잘 타일러서 격려와 위로를 해주고 ‘영적 체험자’로서 지녀야할 덕목을 일러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영적지도자가 외적 표징을 우선시 하지 않고 또한 성급하게 판단하여 홍보하지 않고, 관할 책임자와 긴밀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신중하게 이 문제를 대했어야 했다. 그리고 늦게라도 교도권의 선언을 받아들이고 그 결정에 순명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과 신념을 앞세워 교도권을 무시하고 나주현상에 개입한 성직자만 없었더라면 이렇게 분열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영향이 극과 극으로 갈릴 수도 있음을 생각하여, 사제 양성 과정에서부터 어느 한 신심에 치우침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올바른 교회관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교회는 신중한 태도와 열린 마음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교회 당국에서는 12년이 넘어서야 최초의 공적인 판단을 내렸다. 너무 늦지 않았느냐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는 기적이나 사적계시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른 신중함 때문이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사도 5,38-39) 그러나 이후 두 번에 걸쳐 공지문과 사목지침을 발표하며 교도권에 대한 순명과 교회와의 일치를 권고했지만 이에 불순명 하였기에 마침내 자동처벌 파문제재에 해당하는 교령을 발표하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결코 이들에 대해 어떤 예단을 갖지 않고 언제든지 마음을 바꾸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비록 율리아와 그 추종자들이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편향된 신심행위로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갔지만, 공지문과 교령에서 반복하여 언급했듯이, 교회는 자부적 사랑으로 언제든지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인내롭게 유지해야 할 것이다.


  4) 영성생활에 있어서 정서적인 측면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말씀처럼, ‘보거나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2코린 5,7; 참조: 로마 8,24-25).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어떤 표징들을 원하고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는 이성만으로 또는 감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을 인식하고 믿는 데는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과 이성은 진리이신 하느님을 향해 날아오르는 두 개의 날개와도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성만을 강조하거나 또는 감성만을 강조하면 신앙생활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감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맹목적이거나 맹신적 경향을 띠게 되고 이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마음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하게 된다.


이적현상 또는 사적계시에 매달리는 현상은 마음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에서 충족할 수 없는 종교적 욕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영적갈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교리와 제도 중심으로 주지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감성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을 사적계시 또는 이적현상으로 충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무시하기보다는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5) 치유나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음과 사랑을 청해야 한다.


  감성과 정서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십자가의 성 요한이 지적했던 것처럼, 외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에 집착할 때 오는 위험이 어떠한가를 우리는 충분히 경험하였다. 그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은 이미 예수께서 가르쳐주셨다. 공생활 시작부터 예수님을 유혹하려다 실패했던 사탄은 다음 기회를 노리며 떠나갔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유혹했다. 사탄의 유혹은 모두 기적과 관련된 것이었다. 돌로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에 당신을 위해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군중을 위해서는 빵을 많게 한 기적으로 배부르게 해주셨다. 이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이 유혹도 피하셨다(요한 6,15 참조). 또한 ‘십자가 위에서 뛰어 내리면 믿겠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뛰어내리지 않으시고 그대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참조: 마르 15,29-32). 사탄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신앙인은 눈에 드러나는 결과나 치유나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믿음과 사랑을 청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의 신앙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말씀처럼, ‘보거나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2코린 5,7; 로마 8,24-25)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는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겸손하게 주님을 찾으며 애덕의 실천에 매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세에 동화되지 않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다(로마 12,2).


  6) 끝으로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생활로 나아가도록 안내하여 다시는 이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나주현상에 대한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 공동체가 이런 일에 성숙하게 대처하고, 신자들이 건전한 신앙생활에서 오는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성서신학, 교의신학, 전례학, 사목신학, 영성신학, 교회법 그리고 그 외 관련 전문가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심층적으로 나주현상에 대한 문제들을 정리하여 백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 론


  식별의 본질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시대의 징표를 읽음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사목헌장 4항. 11항; 로마 12,2).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교회 안팎으로 혼란과 분열을 가져온 나주현상은 잘못된 식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본 논문은 식별에 대한 성경과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통해 오늘날의 영적 현상에 적용할 수 있는 식별기준을 정하고, 이를 토대로 나주 현상을 식별해보았다.


  1.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식별의 문제는 구약과 신약 시대는 물론 교회 역사상 항상 있어 왔다. 그만큼 미묘한 영적 현상들이 많이 일어났다는 반증이다.


2. 영적 현상이나 신비체험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그 체험을 말로 전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체험 이후에 그 원체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해석을 덧붙인 성찰을 마치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 전통에서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마태 7,16-18; 12,33)는 원리에 따라 외적인 판단기준들을 마련하여 왔다. 그 기준은 크게 세 가지, 첫째,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의 일치 여부, 둘째, 체험자의 인품과 관련하여 진실성과 교도권에 대한 순명(겸손)의 문제, 셋째, 성령의 열매인 덕성들 특히 애덕을 실천하는 것이다.


3. 가톨릭 신앙은 개인적인 확신이 아니라 공적인 신앙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자신의 체험과 신념을 주장할 수 있으나 그것을 공적으로 주장하려면 먼저 자신의 체험과 신념에 대한 공적인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 권한은 체험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도권에 있다. 특히 주장하는 내용이 기적이나 사적계시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겸손이 중요하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체험과 개인적인 신념을 앞세워 교도권을 무시함으로써 엄청난 교회분열을 가져왔다.


4. 교회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언제나 신중했다(참조: 사도 5,38-39). 그래서 나주 현상에 대해 관망하고 있던 관할 교구장은 12년이 넘어서야 최초의 공적인 판단을 내렸다. 율리아가 ‘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적현상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증명할 근거가 없고, 소위 ‘나주 성모님 메시지’ 역시 ‘사적계시’라고 믿을만한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고 했다.


5. 율리아는 처음에 어떤 현상을 체험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가르침대로 율리아가 겸손하게 자신의 체험을 교회에 맡기고 인내롭게 기다리며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첫 번째 공지문이 발표되기 전부터 율리아와 추종자들은 별도로 자기들만의 기도모임과 기념일을 정하여 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이들은 첫 번째 공지문에서 파문교령까지 총 6번의 교도권의 선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구별 지역별 담당자를 정하는 등 조직화하여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교회와의 일치를 거부했다.


6. 나주 율리아 문제는 100년간의 박해와 신앙 자유를 얻은 지 100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한국 교회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에 벌어진 일이다. 따라서 나주현상은 1980년대 이후 한국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성경 공부, 영성에 대한 갈증과 깊은 관심 그리고 평신도들의 성장과 교회 안팎의 세속화 현상 등 이런 거시적 안목에서 보아야 한다. 나주 문제를 우리 교회의 수치로 여기거나 도려내야 할 암적 존재로 여기고 뿌리를 뽑아내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부정적인 현상도 우리 교회와 교우들 속에 그 원인과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한국 사회와 문화에 뿌리내리고 ‘우리 것’이 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도와 진통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거론하는 토착화, 복음화는 다름이 아니라 이런 진통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기나긴 여정이다. 교회는 어머니와 교사로서 정도에서 벗어난 양들을 우리에 불러들이고 때로는 찾아가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타일러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할 것이다.


7. 율리아와 그 추종자들은 가톨릭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모든 사심을 버리고 신앙인의 가장 기본자세인 겸손과 순명의 정신으로 교회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는 첫 번째 공지문에서부터 마지막 파문교령까지 교회가 일관되게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공지문과 교령은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일치하라는 사랑의 채찍이기 때문이다.


8. 끝으로, 나주 문제는 시간이 가면 그냥 저절로 해결이 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고, 덮어두고 잊어버려도 되는 그런 사건도 아니다. 그래서 반면의 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대증적(對症的)인 반응이 아니라 여유와 시간을 갖고 나주 문제를 성서신학, 교의신학, 전례와 성사, 사목신학, 교회법, 영성신학 등 관련분야 전문가들이 다각도에서 연구하고 토론하여 하나의 백서를 만들어 남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