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식
교구[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1. 윤공희 대주교(3)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2-04-07
- 조회수 : 689
장차 평양교구 재건을 다짐하며 고향을 떠나오다
공산정권의 한국교회 탄압 점점 심해져
부제 둘은 남아 신자들 돌보려 했으나
신부들도 줄이어 잡혀가는 긴박한 상황
지학순 신학생과 천신만고 끝에 월남
서울 대신학교에서 수학 후 사제수품
■ 해방 무렵의 평양교구
나는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으로 덕원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평양교구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의 전교와 후원 등으로 겨우 꾸려지는 시기였다. 1943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홍용호 주교님께서 평양교구장이 되셨다. 홍 주교님의 노력으로 신학생들도 많이 모였다. 히지만 메리놀 외방 전교회(메리놀회)의 지원 없이 신학생 양성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컸다. 교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학생 양성비 모금을 위한 캠페인도 벌였다. 당시 교구 총대리 신부님께선 각 본당을 돌면서 신자들에게 신학생 양성과 그 모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때 캠페인 표어가 ‘우리 신학생은 우리 손으로’였다. 큰 본당이든 작은 본당이든 각 본당의 규모와 신자 개개인의 형편에 맞게 십시일반(十匙一飯) 모금을 했다. 그 결과 재정 문제는 단번에 해결이 됐다. 신학생을 귀하게 여긴 홍 주교님과 전쟁 속 힘든 시기임에도 더욱 마음을 모으고 행동한 평양교구 신자들 덕분이었다. 교구의 어려운 상황은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각성의 계기가 됐다.
1945년 8월 꿈에 그리던 해방이 왔다. 태평양 전쟁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메리놀회 신부님들은 즉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평양교구로는 돌아갈 수 없어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이북에 침입해 들어오자, 얼마 안 돼서 평양교구에서는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교구 재단법인 사무를 전담하고 평신도로서 홍용호 주교님의 비서를 맡아 교구청에서 근무하던 강창희씨가 어느 날 새벽, 평양시내 한 큰길 모퉁이에서 총살된 채로 발견됐다. 마침 주교관에서 지내고 있던 나는 소식을 듣고 장선흥 부제와 함께 달려가서 시신을 수습했다. 총알이 가슴에서 잔등으로 뚫고 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