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그와 함께 엮인 교회사의 목격자, 윤공희 대주교.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대교구장이었던 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기억하지만, 1924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북한의 덕원신학교를 거쳐, 월남했고, 한국 전쟁을 겪은 것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구순을 훌쩍 넘긴 윤공희 대주교는 그 시절의 기억을 모두 꺼냈고, 구술로 시작된 이야기가 이번에 “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됐다. 윤공희 주교의 기억은 아주 세세하고 정확해서 한편으로는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근현대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의정부교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가톨릭 구술사 채록’ 두 번째 프로젝트로 지난해 3월 시작한 이 작업은 책 발행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윤 대주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편집팀과 글을 정리한 권은정 작가는 10여 번 윤 대주교를 만났다. 그리고 매번 정리된 초고에 윤 대주교는 직접 일일이 빨간 펜 수정본을 건넸다.
25일 광주가톨릭대에서 만난 윤 대주교는 교정과 수정에 참여하는 것이 점점 기쁨이 됐다면서도,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정리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이제 할 이야기는 다 했다”며 만족한 웃음을 보였다.

책에는 윤공희 대주교의 진남포 본당 복사 시절, 일제강점기 메리놀회 해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해방과 북한 정권에 의한 수난 시기, 덕원신학교 강제 폐쇄와 스승 사제들의 죽음, 한국 전쟁과 월남, 서울에서의 사제 서품, 다시 찾은 평양교구 신자들과의 만남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생생하다.
“한국과 일본 가톨릭교회가 일본 정부와 조율하면서 전반적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을 전환한 것과 달리, (메리놀회) 모리스 몬시뇰이 관할하는 메리놀회의 평양교구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스위니 신부님도 그중에 속했다. 전남포본당 스위니 신부님이 해성학교 학생들의 신사 참배를 거부하자 당시 전남포 일본 관리가 그 문제로 스위니 신부를 만나러 성당으로 오기도 했다. 후에 스위니 신부를 소환해서 위령제 불참 이유를 추궁하며 애국주의 방침에 따라 의식을 따를 것을 강요하고 끝까지 거부하면 해성학교를 폐교하겠다고 위협했다.”(책 47-48쪽)
“나는 신학교로 돌아오기 직전에 한 사건을 목격했다. 1945년 10월 하순 무렵 집에서 개학 날을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신학생들은 평양교구 주교관으로 모이라는 전갈이 왔다. 나는 얼른 주교관으로 달려가 먼저 와 있던 지학순과 함께 다른 신학생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공산당의 잔혹한 행위를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바로 강창희 야고보 회장의 피살 사건이었다.... 공산당은 천주교회가 더 이상 나서지 말라는 경고로 강창희 회장을 본보기 삼아 살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 공산당은 관후리성당을 돌려받고자 하는 평양교구 홍 주교 이하 전 신자들의 의지를 결코 꺾지 못했다.”(155쪽)
“나는 급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몇몇 학생은 벌써 일어나 있었고 누군가 (덕원)수도원에 공산당이 쳐들어왔다고 말했다. 신학생 중 몇 명이 수도원으로 달려가서 그날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구부정한 몸을 지팡이에 힘겹게 의지한 백발의 사우어 주교 아빠스님께서 방에서 나오시고 있었고 그 앞으로 수도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모든 것을 깨달은 주교 아빠스는 스스로 걸어 나오셨다. 수도자들이 다시 막아서며 매달릴 때 일흔이 넘은 백발의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께서 부르시니, 또 주께서 행하심과 같이, 또 수많은 순교자와 같이 형장으로 나가야 한다. 이제 나 없는 이 자리를 너희에게 부탁하니 물러가 편히 쉬어라.’”(176쪽)
“팀장이 앞에서 줄을 넘으며 말했다. 우리는 팀장의 말을 따라 아주 조심스레 38선을 넘었다. 나는 속으로 ‘데오 그라시아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드렸다. 안도의 숨을 쉬면서 한편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이 한 가닥 철제 가름대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고통받으며 지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218쪽)
아름다운 복사 시절, 해성학교와 덕원신학교 시절을 지나, 잔혹한 이념의 전쟁, 분단을 넘어온 윤공희 대주교는 1950년 3월 20일 사제품을 받는다. 형제 가운데 의사가 된 형님과 단둘이 월남한 까닭에 서품을 축하할 가족들은 곁에 없었다.
그날 그는 “나는 무척 행복하고 기뻤지만 가슴 한 구석은 허전한 게 사실이었다. 북에 두고 온 모든 이들이 생각났다. 덕원신학교의 교수 신부님들, 수도원 식구들, 평양교구 선배 신부님들, 그리고 가족들, 모두 이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라고 술회한다.
사제가 된 윤공희 신부는 서울 명동에서 첫 소임을 지내고 그 가운데 다른 경로로 월남한 형님을 만나고, 또 서울이 수복된 뒤에는 잠시 평양교구로 들어가 신자들을 만난다. 북한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스승과 선배들의 무덤 앞에서 오래 기도한 그는 “조만간 다시 찾아와 그분들을 수도원 땅으로 옮겨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믿음은 오늘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윤 대주교는 비록 공부하고 살아가던 덕원신학교를 떠나 남한에서 사제가 됐지만 “우리는 평양교구 신부”라는 신원 의식을 잃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도 1924년에 태어난 윤공희 대주교와 1927년 실질적으로 독립교구가 된 평양교구는 엇비슷하게 100년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처음 모든 것을 갖추게 한 북녘땅은 ‘평양교구 출신’이라는 말과 함께 여전히 발 딛고 있는 곳인 셈이다.
성신소학교 교사, 포로수용소 군종 신부 등 사목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로마 유학을 다녀왔고, 1963년 39살에 초대 수원교구장으로 주교품을 받는다. 이때 스스로 정한 사목표어는 “팍스 크리스티” 그리스도의 평화였고, 사제품 성구이기도 하다.
“우리는 통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일은 하느님 당신이 섭리하시는 대로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도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윤 대주교는 책의 맨 마지막 통일에 대한 노력을 계속해야만 한다고 당부한다. 그의 전 생애를 돌아보며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 말하는 그는 원래 하나였던 갈라진 것들을 다시 하나로 되돌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하느님의 섭리이며, 그것에 동참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다움이다.
식민지, 전쟁, 분단의 시절을 관통해 살아온 한 사람, 그리고 북에 가족들을 두고 와 영영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으로서 평화는 너무나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화두 삼아 살아온 윤 대주교에게 그의 평화란 무엇인지 물었다.
윤공희 대주교는 “한 아버지 아래의 형제들이 형제애로 사랑하며 하느님나라를 지향하는 것이다. 누구도 미워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보듬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에 대해 정치적으로 왜곡하는 상황을 놀라워하면서, “요즘 세대는 전쟁을 겪어 보지 못했고, 분단이 뼈저린 상황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갈라져 있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라는 것, 역사와 진실을 통해 결국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한 상황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윤 대주교는 마지막으로 “현재 상황에 안주하면 영원히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면 남남 갈등이 해소되어야 한다. 남과 북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한 형제이며,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적 사랑으로 모두를 보듬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