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정착’이라는 단어를 많이 듣게 되어, 이 단어의 의미와 함께 방법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고 있다. 칠레에서 6년 동안 선교 사제로 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스도를 위한 나그네’의 삶은 외로움과 같은 고독의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관계를 맺었던 삶을 잠시 멈추고, 기다림과 인내, 문화의 충돌과 적응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칠레 원주민들의 말과 마음과 눈빛에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느꼈다. ‘정착’은 문화와 사회적 현상에 있어서 ‘자리 잡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문화의 정착이라면 문화를 수용해 이해하는 것이고 정착한 사회라면 그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필자가 만나고 대화하는 이들은 이주 노동자와 난민, 북한 이탈 주민들이다. 포괄적 의미에서 이들은 모두 이주민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자국을 떠난 이들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싫어하는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도맡은 이주 노동자들! 전쟁이나 굶주림 박해로 생명의 위협을 피해 이주할 수밖에 없는 난민들! 굶주림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 이탈 주민들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우리나라에 받아들여져 ‘정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착’이 말보다 쉽지 않다.
지난 4월 중순 이후, 코로나19 방역 지침이 완화되면서 광산구 송정동에 위치한 ‘천구교 광주대교구 이주민회관’을 찾는 베트남·필리핀·동티모르 친구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예전과는 다르게 합법적 이주 노동의 시간이 끝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던 친구들이 이제는 한국에 정착하기를 원한다. 어렵게 우리나라로 입국해 난민을 신청하는 이들도 그렇고, 북한 이탈 주민들에게 ‘정착’은 삶의 목적이다.
그런데 ‘정착’을 위해서는 기존의 삶에 대한 변화·조정·포기 등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원주민들의 문화가 이미 자리잡고 있어 항상 충돌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주민의 말을 하고, 원주민의 음식을 먹으며, 원주민의 풍습과 관례를 알고 함께해야 ‘정착’할 수 있기에 어렵다. 이주민들의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착’지의 원주민들과 통합되기 위해선 원주민들의 삶의 토대인 문화와 풍습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의 문화를 말살하는 것은 서로의 문화를 말살하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주민의 받아들임과 적응을 위한 인내는 곧 원주민들의 이해와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착’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정착’지를 찾는 이주민과 그것을 바라보는 원주민 사이에서 ‘정착’의 시작점은 무엇인가? 먼저 ‘정착’지의 토대에 자리 잡는 것이다. 나무를 옮겨 심었을 때, 뿌리가 잘 내릴 수 있는 토양에 옮겨 심는 것처럼 자리 잡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착’의 시작점이다. 그리고 뿌리가 그 토양의 흙들을 감싸 양분을 섭취하면서 튼튼하게 자라 안착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될 어려움과 고난은 원주민들의 환대와 보호, 곧 연대를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주민들이 ‘정착’하려는 우리의 사회와 문화는 좋은 토양일까?
‘정착’하려는 이들을 보고 반대의 목소리가 크다. 우리의 것을 잃게 될 것이고 급기야 이주민들이 모든 것을 다 빼앗길 것이라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정착’하여 잘 안착한 이주민들의 문화와 원주민의 문화는 당연히 충돌할 것이다. 그런데 이 충돌은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 그래서 배타심과 차별을 넘어서 새롭게 도약하는 우리 사회를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반대는 무관심과 차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 계속 증가하는 이주민과 난민들을 보면서 예수의 말씀을 상기해 본다. 마태오 복음 25장 35절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그런데 ‘정착’을 위해서는 기존의 삶에 대한 변화·조정·포기 등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원주민들의 문화가 이미 자리잡고 있어 항상 충돌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주민의 말을 하고, 원주민의 음식을 먹으며, 원주민의 풍습과 관례를 알고 함께해야 ‘정착’할 수 있기에 어렵다. 이주민들의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착’지의 원주민들과 통합되기 위해선 원주민들의 삶의 토대인 문화와 풍습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의 문화를 말살하는 것은 서로의 문화를 말살하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주민의 받아들임과 적응을 위한 인내는 곧 원주민들의 이해와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착’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정착’지를 찾는 이주민과 그것을 바라보는 원주민 사이에서 ‘정착’의 시작점은 무엇인가? 먼저 ‘정착’지의 토대에 자리 잡는 것이다. 나무를 옮겨 심었을 때, 뿌리가 잘 내릴 수 있는 토양에 옮겨 심는 것처럼 자리 잡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착’의 시작점이다. 그리고 뿌리가 그 토양의 흙들을 감싸 양분을 섭취하면서 튼튼하게 자라 안착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될 어려움과 고난은 원주민들의 환대와 보호, 곧 연대를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주민들이 ‘정착’하려는 우리의 사회와 문화는 좋은 토양일까?
‘정착’하려는 이들을 보고 반대의 목소리가 크다. 우리의 것을 잃게 될 것이고 급기야 이주민들이 모든 것을 다 빼앗길 것이라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정착’하여 잘 안착한 이주민들의 문화와 원주민의 문화는 당연히 충돌할 것이다. 그런데 이 충돌은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 그래서 배타심과 차별을 넘어서 새롭게 도약하는 우리 사회를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반대는 무관심과 차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 계속 증가하는 이주민과 난민들을 보면서 예수의 말씀을 상기해 본다. 마태오 복음 25장 35절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