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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교구''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어 감사합니다''...광주대교구,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백수(白壽) 감사미사’ 봉헌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2-08-29
  • 조회수 :  1023

(광주가톨릭평화방송) 노진표 기자·김소언 기자 = 천주교광주대교구는 오늘(27일)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백수(白壽) 감사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천주교광주대교구는 27일 염주동성당에서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백수(白壽)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감사미사는 이날 오후 2시 염주동성당에서 윤공희 대주교가 주례한 가운데 봉헌됐으며 교구장인 김희중 대주교를 비롯해 옥현진 총대리주교, 전임 교구장인 최창무 대주교, 주교회의 부의장 조규만 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등 한국 천주교 주교단과 일본 센다이 교구장 가쿠탄 에드가 주교, 주한 교황청 대사대리 페르난도 레이스 몬시뇰, 강기정 광주시장, 정의당 강은미 의원, 사제, 수도자, 신자, 지인 등 3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미사 도중 참례자들은 윤공희 대주교가 걸어온 발자취가 담긴 영상을 시청하며 윤 대주교가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온 99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미사 중 열린 축하식에서는 광주대교구 교구민들이 윤 대주교의 백수를 맞이해 준비한 영적 예물이 전달됐습니다.
 

광주대교구 교구민들이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백수(白壽) 감사미사’에서 윤 대주교의 백수를 맞이해 준비한 영적 예물이 전달됐다.


페르난도 레이스 몬시뇰은 축사를 통해 “윤 대주교는 자신이 받은 모든 은총과 재능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에 대한 봉사에 봉헌했다”며 “특히 가장 작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깊이 봉사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윤 대주교가 보여준 삶의 모범은 우리에게 선교적인 정신과 책임을 새롭게 해준다”며 “윤 대주교가 보여준 모범에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단을 대표해 주교회의 부의장 조규만 주교는 "윤 대주교는 일제 식민기의 설움과 남북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시는 등 고난의 삶을 살아왔다며 “특히 5.18 당시 목격자로만 머물지 않고 사태의 진상을 알리고 희생당하는 시민과 성직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써왔다"고 말했습니다.

광주대교구 사제단을 대표해 안세환 신부는 “윤 대주교가 광주대교구 교구장을 재임하던 시절 직접 사제품이 올려준 150명이 넘는 교구 사제 가운데 가장 막내로서 이 자리에 섰다”며 "윤 대주교는 오로지 주님의 뜻을 받드는 삶을 살았고 교우들을 위해 봉사했다"고 말했습니다.
 

천주교광주대교구는 27일 염주동성당에서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백수(白壽)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안 신부는 이어, "곧게 뻗은 대나무처럼 늘 꼿꼿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어 감사하고 푸르른 소나무처럼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켜줘 감사하다"며 "누가 뭐라 해도 윤 대주교는 우리 교구의 큰 어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교구민들을 대표해 광주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장 윤관식씨는 축사를 통해 “광주대교구의 모든 신자들은 윤 대주교의 백수를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윤 대주교는 숱한 변함과 역사적 순환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 사제의 길을 충실하게 걸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80년 너무나 참혹했던 5월, 민주사회와 대동세상을 외쳤던 그때 믿고 의지할 것이 전무한 상황에서 윤 대주교는 교구 사제들과 함께 진상 규명과 구속자 석방, 광주시민의 명예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셨던 윤 대주교의 백수를 축하드린다"고 덧붙였습니다.
 

광주가톨릭평화방송 피아트도미니 소년합창단이 축가를 부르며 윤공희 대주교의 백수를 축하했다.


축하식에서 교구 합창단과 광주가톨릭평화방송 피아트도미니 소년합창단은 축가를 부르며 윤 대주교의 백수를 축하했습니다.

이후, 윤 대주교는 답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지낸다"며 "이 순간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사랑에 맡겨 살아가겠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가 백수 축하미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다.


김희중 대주교는 "백수 잔치를 하기까지 많이 협력해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임 대주교와 오랜 세월 보필해주신 원로 사제들, 그리고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1924년 11월 8일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에서 4남 1녀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난 윤공희 대주교는 1946년 3월 함경남도 덕원신학교에서 철학과와 신학과를 마치고 부제가 됐습니다.

이후 1950년, 초대 원주교구장을 지낸 자신의 신학교 동기이자 세 살 위였던 故(고) 지학순 주교와 함께 월남했으며 서울 가톨릭대학교 전신인 성신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故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아 서울 명동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사목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가 1950년 3월 21일 사제품을 받은 이튿날 첫 미사를 주례하는 모습


또 6.25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잠시 내려온 윤 대주교는 부산 UN포로수용소에서 종군신부를 맡았고 전쟁이 끝난 1954년에는 부산 가톨릭도서관 부관장을 거쳐 서울 성신중·고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습니다.
 
이후 1956년 9월 로마 유학길에 올랐던 윤공희 대주교는 로마 울바노대학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 로마 그레고리안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윤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총무를 맡았으며 3년 뒤인 1963년 10월 7일 교황청으로부터 수원교구장에 임명된 데 이어, 같은 해 10월 20일 주교품을 받았습니다.

또한 1963년 12월 21일 초대 수원교구장에 오른 윤 대주교는 1967년 3월 24일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겸임하도록 교황청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故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기 전인 1968년 4월까지 1년 동안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수행했습니다.
 
이 밖에도 윤 대주교는 수원교구장 재임 당시인 1967년 4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임시의장을 거쳐 1975년 3월까지 주교회의 부의장을 지냈습니다.

이후 윤 대주교는 지난 1973년 10월 25일 대주교로 승품됨과 동시에 광주대교구장으로 착좌했으며, 교구장으로 재임할 당시 대외적으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 사회주교위원회 위원장, 성직주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80년 5.18민중항쟁의 참상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런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광주가톨릭평화방송 D/B>


윤 대주교는 1980년 5․18민중항쟁을 겪으면서 광주대교구를 움직이는 대주교로서, 광주의 어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겪었던 암울한 당시 사건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습니다.

윤 대주교는 광주민중항쟁이 끝난 뒤 당시 서울수도경비사령부에 있던 군종신부의 주선으로 80년 7월 하순쯤 국보위 위원장이던 전두환씨를 만나 당시 구속됐던 사람들을 모두 사면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오른쪽)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5.18사형수들의 사면을 촉구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과 사면에 대한 논의 결과 자신이 직접 건의하겠다며 81년 4월 1일 대통령이 된 전두환을 만나 사형수에 대한 사면을 촉구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81년 5월 10일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공동으로 주례한 가운데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미사를 봉헌하는 등, 5월 항쟁이 끝난 뒤에도 광주의 아픔과 진실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윤공희 대주교가 1984년 5월 4일 광주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영접하고 있다.


윤 대주교는 이후,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을 이끌어 냈고 특히 첫 지역 방문지로 교황을 광주에 모신 일은 자신을 가장 흥분시켰던 일로 꼽았습니다.

윤 대주교는 광주대교구장에 취임한지 27년만인 지난 2000년 11월 30일 교구장으로서 등에 지고 있던 무거운 십자가를 내려놓았습니다.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백수(白壽) 감사미사’가 끝나고 염주동성당 계단에서 윤공희 대주교가 미사를 참례한 주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광주대교구장 착좌 당시 49살 중년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한 세기에서 딱 1년을 남긴 올해 99세로 사목 일선에서 물러난 뒤 평범한 사제로서의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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