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식
기타[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4. 이병호 주교(4)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2-10-05
- 조회수 : 662
앞서 말씀드린 대로, 「준주성범」을 읽고는 사제의 길을 분명히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혜화동에 있는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했지요. 그런데 그 길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말해놓고 나니 엉뚱한 생각이 드는군요. 최근에 저는 「20세기 신학 결산 보고서」 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제목의 프랑스어 책을 읽었습니다. 두 권, 총 1585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인데, 20세기에 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른 그리스도교 전체에 걸쳐서 신학과 교회생활에 일어난 변화와 동향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가톨릭으로서는 1962~1965년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전환점으로 하는 동향을 소개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학 각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 열두 분을 소개합니다. 이들 중 반은 개신교, 반은 가톨릭을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가톨릭측 신학자로서는 폰 발타사르, 마리 도미니크 셔뉘, 이브 콩가르, 앙리 드 뤼박, 칼 라너, 에드워드 스킬레벡스 등 공의회 전후시기에 기라성 같이 떠올랐던 분들이지요.
그런데 이분들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이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며 그것이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실제 삶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크게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거기에서 벗어난 것은 거의 하나같이 옛날 교부들에게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복음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데레사 자서전이나 「준주성범」을 읽으면서 온 존재 깊이 뚫고 오던 충격이나, 생생한 복음적 삶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신학교의 실상을 체험하며 나름대로 실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집에 와 있던 어느 날, 어머님께 불쑥 한마디 했습니다. “어머니, 나 신학교 그만둘까?” 물으면서도 예상되는 답변이 이미 머릿속에 있었지요. “일단 들어갔으니,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러고서도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등이었죠. 그런데 제 말이 나가자마자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나와라.” 당시에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나온다는 것은 온 동네 사람들 거의 다가 신자인 나바위의 분위기로서는, 지금이라면 사제품을 받고 나서 그만두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님도 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어머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너를 외국에 보내줄게.” 외국은커녕 서울에 보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처지인데도, 어머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때 어머님이 제가 예상했던 반응을 보이셨더라면, 저는 실제로 신학교를 나왔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