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식
교구교구장이 된 ‘막둥이’…옥현진 대주교 삶과 신앙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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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옥현진 대주교는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늘 한결같은 목자입니다.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며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앞장선 사제이기도 합니다.
옥 대주교의 삶과 신앙을 장현민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옥현진 대주교는 1968년 전남 무안에서 2남 4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옥 대주교는 가정과 본당에서 사랑받는 ‘막둥이’였습니다.
오래전부터 옥 대주교를 보아온 사람들은 다정다감하고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임동균 울프란노 / 광주대교구 신동본당, 옥현진 대주교 초·중학교 동창>
“지금의 성품이나 그 당시의 성품이나 보면 똑같습니다. 청년회 활동이라든지 아니면 신학생 때 모습을 보면 항시 그 모습이셨습니다.”
성가정에서 나고 자란 옥 대주교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성소를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독실한 어머니 덕에 어려서부터 복사를 서는 등 신앙을 가까이한 덕분이었습니다.
<모매실 루치아 / 옥현진 대주교 어머니>
“(어렸을 때) 신부가 되고 싶어 애기가 그래요. 그래서 애기가 별소리를 다 한다, 그런데 그것을 잊지 않았어요.”
사제의 길을 걷는 중에도 어머니는 옥 대주교에게 신앙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교구장 임명 발표 소식을 들은 직후 옥 대주교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옥현진 대주교 / 신임 광주대교구장>
“저희 어머님이 떠오릅니다. 최근에도 교구청으로 귀청하려고 하는데 대문 앞에서 어머님이 묵주를 들고 쪼그리고 앉아서 기도하시다가 불쑥 일어나셔서 깜짝 놀랐어요.”
1994년 사제품을 받은 옥 대주교는 1996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교회사를 전공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04년 귀국한 이후에는 운남동본당 주임을 거쳐 2006년부터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2011년 5월 옥 대주교는 광주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됩니다.
이후 교구 보좌주교 겸 총대리로 활동하면서 약자와 함께하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는 사목에 앞장섭니다.
세월호 참사 때에는 교구 세월호 1주기 준비위원장을 맡아 진상규명 활동을 지원하고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장·사회홍보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사목을 펼쳐왔습니다.
최근에는 한국 교회 시노드 대표를 맡아 교회의 쇄신과 변화에도 역할을 해왔습니다.
옥 대주교의 사목표어는 ‘내 안에 머물러라(Manete in me)’입니다.
그 안에는 항상 예수님 안에서 살길 바라는 옥 대주교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옥현진 대주교 / 신임 광주대교구장>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 길을 걸어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 도우심만 믿자, 그리고 혼자 하는 게 아니라 / (교구민들의) 도움을 믿고 한번 걸어가 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기도했습니다.
CPBC 장현민입니다.